어렸을 때 이금이 작가의 <유진과 유진>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 작가만 믿고 빌린 책 <허구의 삶>.
삶에 대한 철학이 드러나는 내용과 평행우주라는 대중적인 과학용어가 등장해
생각할 거리와 거부감 없는 판타지성을 모두 잡은 소설이다.
평행우주와 현실의 경계에서 헤매다 죽은 남자
허구는 학생 때부터 삶에 어떠한 미련도 없는 모습으로 나온다. 과수원이 있는 2층 부잣집과 끔찍이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님이 있지만 여행자라는 꿈같은 소리나 해대고 공부도 사랑도 우정도 무엇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
읽는 내내 팔자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구석에서는 계속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허구가 저렇게 시니컬하게 자라게 된 이유에는 분명 부모님이 무언가를 했을텐데 그것이 무엇일까?
100개의 가정은 100개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가정환경은 겉으로는 아무리 번지르르하고 빛나보여도 속사정은 태어나서 겪어본 아이가 아닌 이상 아무도 알지 못한다.
허구는 왜 부모님과 데면데면한걸까?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허구는 왜 돈의 기쁨을 모르는걸까?
가난이 열등감이 되어 어른이 되지 못한 남자
부모가 없는 상만은 외삼촌 댁에 얹혀 살면서 아주 궁핍하게 자란다.
상만의 눈에는 부자 부모님이 있는 허구가 눈물나도록 부러운 자식이다.
상만은 돈은 많되 욕심은 없는 허구의 문제집과 부모님, 좋은 환경들을 옆에서 양껏 취하며 삶을 꾸려나간다.
하지만 없이 자란 덕에 보여지는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정작 가족과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고 이혼 위기에 처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상처보다 상처를 대하는 태도
허구를 키워준 부모는 허구를 어린 시절에 납치한 양부모였다. 친부는 허구를 준 대가로 받은 돈을 노름하는데 쓰는 쓰레기였다.
허구는 이기적인 어른들 때문에 세상에 염증을 느껴 여행자로서 세상을 떠돌게 된다. 마음 속에 있는 상처를 계속 매달고 다니면서 세계 곳곳의 화려하고 멋있는 것들을 보러 다녔다. 그러면 본인의 가정사와 그로 인해 생긴 상처를 외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허구의 곁에 좋은 어른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안타까워한다. 허구가 돈과 자유 여행 등 많은 것을 누린 것에 비해 허구가 행복한 적이 한번이라도 없었던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허구는 스스로에게 무책임하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나 또한 주변에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이 참 많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의 시선이 아닌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과 나를 봐야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이 힘들었다고 해서 허구처럼 세상을 놓아버리기에는 이곳저곳에 즐거움이 참 많다. 허구가 나처럼 매일 아침마다 긍정확언을 했더라면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텐데..
나를 통제하면서 삶의 주도권을 가진다는건 짜릿한 일이다. 본능이 아닌 이성이 느낄 수 있는 고도의 쾌락이다.
허구는 어쩌면 현수였을 때가 가장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5살때 납치를 당한 후, 허구로 개명 당했을 때부터 헛인생을 살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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